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00006&CMPT_CD=P0000



DJ 영전에 큰절 하는 미국인 교수
[사진] 와다 하루키와 마크 셀던,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
09.08.20 10:21 ㅣ최종 업데이트 09.08.20 10:51 김창규 (tokyo119)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이틀째인 8월 19일, 서울광장 분향소에는 도쿄대 명예교수인 와다 하루키와 미국 코넬대 교수인 마크셀던이 찾아왔다.

장례운영회 측은 이례적으로 시민들에게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이 두 조문객을 먼저 받아들였다. 현장 분위기와는 달리 기성 언론은 두 사람의 조문을 거의 보도하지 않거나, 사진 없이 단신으로 실었다. 하지만 이 조문은 결코 가볍게 보도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와다 하루키 교수는 일본의 우익단체가 눈엣가시로 생각하는 대표적인 일본의 양심 지식인이다. 국제 시민 운동가로 더욱 잘 알려진 그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김대중이 납치되었을 때, 자국의 정부에 항의하면서 그를 구해내기 위해 전력을 다한 사람이다. 자신의 생활을 포기하다시피 김대중의 구명운동에 매달린 그는 김대중이 석방되어 미국으로 출국할 때 까지 단 한시도 국제적인 연대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와다 하루키와 마크 셀던 ⓒ 김창규

마크 셀던 교수 또한 국제적인 시민운동가다. 동아시아학의 권위자인 그는 이 분야에서  미국 내에서 가장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는 학자 중 한명이다. 와다 하루키와 마찬가지로 김대중 납치 사건 당시, 미국 내에서 적극적인 김대중 구명운동을 펼쳤다. 한국의 독재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던 미국정부 하에서 교수의 신분으로 당시로서는 3국에 불과한 한국의 민주인사를 위해 발벗고 나선 것이다.


영정 앞으로 다가간 마크 셀던이 갑자기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동양 문화권의 조문사절단 조차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경우가 없는 것을 감안하면 굉장히 파격적인 장면이다.

 
특히 서양문화권에서는 한국의 절 문화가 우상숭배로 오해되어 거부감을 주기도 한다. 마크 셀던의 경우, 동양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행동이다.
 

▲ 무릎을 끓고 있는 마크 셀던   ⓒ 김창규




▲ 절하는 마크셀던과 조문의 예를 올리는 와다 하루키    ⓒ 김창규

 


 

덧붙이는 글 | 두사람에게는 특이한 공통점이 있는데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국제적인 무대에서 끊임없이 강조한다는 점이다. 양심적인 목소리를 내는 학자라 하더라도 영토같은 민감한 문제는 함구하는 경향이 많지만 두 사람은 자국 내에서 조차 끊임없이 독도문제를 거론한다. 특히 와다 하루키의 경우, 한일양국에 독도관련 칼럼을 쓴 적이 있을 정도로 적극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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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ia.



 

경향신문 2009년 07월 10일





한겨레 신문 2009년 7월 10일

 


아직 실제로 보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올려주는 경향신문/한겨레의 여러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일을 하나도 못할 정도로 눈물이 자꾸만 난다

49재 추모행사에 가지 않으려고 몇번을 다짐했지만
다녀와야하는건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뛰어든 이번 큰 일
이렇게 잘 마무리지어져서 너무 행복하다


49재이니, 이제 떠나보내드려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난 그렇게 못하겠다
3년상을 치르고 싶다

3년상을 치르고 나면 정권이 바뀌어져있길 간절히 바래본다


앞으로 나와 내 조국에 모두 좋은 일들만 있길...


Posted by Ria.

 

 

[정치] 그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2009.7.9.목요일

네팔에서의 기억나는 대화


2006년 4월 22일 네팔의 절대왕정이 무너지던 날, 나는 델리의 빠하르간즈에서 다큐 촬영과 관련된 현지 답사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국가운영과 관련된 상담을 점쟁이를 불러서 했다는, 나 홀로 중세를 살고 있던 이 나라에 별다른 느낌도 없었다.

그런데... 1주일 뒤, 준비작업에 참여하던 현지 코디의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심장수술을 받게 되는 바람에 금쪽 같은 시간이 거의 일주일 가량 비어버리게 된다. 차기 프로젝트가 네팔과 관련된 것이었던 만큼, 그쪽 상황이나 따져보자고 네팔이라는 나라에 처음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몇 달 뒤, 순전히 경비 때문에 후반행정작업을 네팔에서 하게 되면서 석 달 여간 머무르게 되었고, 그게 인연이 이어져 2007년 여름까지 거의 1년여를 그 나라에서 지내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12년을 외국에서 살았었는데, 여기에 1년을 추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워낙 밖으로 많이 나가 살아서 입맛 자체가 무국적이고, 그때 담배는 끊었었지만 술은 자주 마시던 터라 주인집 아저씨와 심심하면 부어라, 마셔라 했었다.

그러다가... 겨울이 끝나는 것을 축하하는 Holi 축제 며칠 뒤에 있었던 자리에서 이런 대화가 오고 가게 된다. 술자리 참석자는 네팔 중년남 셋, 미국계 프렌차이즈 학교의 선생인 미국인 한 명, 그리고 나.

사진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끝날 즈음, 미국에 함 갔다왔다는 아저씨, 놀라운 것을 봤다고 침을 튀기기 시작했다.

네팔 중년남 1: "바엘 갔는데... 한 그룹이 술을 먹고 있는데, 한 명만 술이 아니라 소다수를 먹고 있더라고. 술 먹는 사람들을 집에 데불다 줘야 하는 사람이었던 거야. 정말 선진국은 뭐가 달라도 다르더라구."
미국인: "뭐... 우리나라라고 해서 음주운전이 완전히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데..."
네팔 중년남 1: "아니... 그래도 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한다는 거잖아. 우린 그런 거 없거든"
미국인: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잠깐 머뭇거리다가) "어이~ 한국은 어때?"
나: "우린 대리운전 불러요"
모두: "우잉? 그게 뭐여?"
나: 몇분간 시스템에 대한 설명...
네팔 중년남1: "거봐. 선진국들은 그런 시스템이 다 있는거잖아"
나: (속으로) "우잉? 우리가 선진국이었어?"
이때... 말을 꺼내는 네팔 중년남2: "우리에게 민주주의라는 건 사치품 같어. 혹시 미국이 우릴 어떻게 해볼 방법은 없나요?"
미국인: (벙~ 찐 표정)
나: "아뉘... 국정 시스템 전환기엔 원래 혼란스러운건데..."
네팔 중년남2: "아냐... 아냐... 지금은 너무 아냐..."
이때 등장하는 주인집 아저씨: "어이~ 그런 골아픈 이야기 고만하고 술이나 더 먹지? 집에 좋은 술 하나 챙겨놨어. 어이~ 마누라~ 안주 좀 더 갖고와!"

거의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술을 펐음에도, 그리고 꽤 많은 자리가 있었음에도 이 날의 대화를 아직까지 기억하는 것은... 이게 중첩되는 한국의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세계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두 번 놀랐다고 한다. 하나는 자국민을 거리낌 없이 학살한 한국 신군부의 잔혹성에 대해, 또 하나는 이렇게 정권을 잡은 이들에게 한국민들이 순순히 순종했다는 것.

왕정은 무너졌지만, 정치권은 뾰쪽한 대안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절대 왕정하에서 눌렸던 모든 사회적 요구들이 쏟아져 나오는 과정에서의 혼란, 그게 싫었던거다. 그리고 찾아온 자유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던 거고.

미개한거 같지? 하지만 우리라고 별로 다를 것은 없어 보인다.


 정치가 뭐지?


2005년 현 정부 들어서 없어진 K본부의 '시사투나잇'의 한 꼭지에서 쫌 많이 황당한 걸 봤었다. 

내용인 즉슨....

수도권의 어느 아파트 단지. 아파트 단지 주변의 멍멍이 농장들이 개들을 도살할 때, 개들을 가스 버너로 그슬리는 통에 매연과 악취로 고생하고 있었다. 아파트 주민대표의 선거에서 핵심 공약이 이 문제의 해결이었고, 주민대표들은 지속적으로 시 당국과 이 문제를 가지고 협의하고 있었고.

그러나 시 당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쏟아지는 민원들 중에 하나일 뿐이었고, 인력 자체가 딸리니 그냥 저냥 미뤄놓고 있는 상태였는데... 기자들이 멍멍이 농장주들을 만나 이 이야기를 하니 농장주들 입에서 이런 대답이 나왔던 것.

"어... 그랬어요? 그거 안 해도 되는 공정인데... 그럼 저희들이 안 하도록 하죠"

수 년간, 갈등의 수위는 높아져가고 있었음에도 이해당사자간의 직접 대화는 단 한번도 없었던 것이다. 직접 대화했었다고 한다면, 수 년전에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음에도... 직접 대화를 하지 않았던 까닭에 계속 그 상태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정치가 뭔가? 정치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하는 웬갖 잡스러운 행위? 아니. 정치의 사전적 정의는 사회 갈등 통합, 비전 제시, 리더십... 뭐 이런거다.

사람들이 다 같은 생각을 할리가 없는 세상에서 갈등의 소지는 언제든지 있는 법이다. 실제로 화장장 건설등의 이유로 '규탄한다'는 등의 플래카드 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해 당사자가 직접 만나서 문제들을 풀어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사람들이 지겨워하는 정치는 '중계방송'이며, 정작 자신의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가는 사전적 의미에서의 '정치'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사람들이 무기력해지고, '희망은 어디 있나요?'와 같은 기운 빠지는 소리나 하는 것도 무엇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러는 거고.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하지만, 진짜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 안하고 벌써 행동들 하고 있다.

지난 토요일, 조용하기만 했던 조계사가 들썩거렸다. 작년 촛불에서도 맹활약했던 쌍코를 주축으로 몇 개의 커뮤니티가 조계사에서 바자회를 열었던 것. 바자회의 목표는 49제에 맞춰 경향신문 1면에 추모 광고를 내는 것이었다.

이해찬 총리의 팬카페인 대장부엉이도 출동했던 터라, 해찬들 아저씨도 찾아왔고... 애장품 몇 점을 경매에 내놓기도 했다.

이 날, 하루 행사를 통해 약 1950만원을 모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직도 계속 후원금들이 밀려오고 있는 상태란다. 그리고 바자회를 하는 동안 계속 물건들이 들어와서 남은 물건은 모두 아름다운 가게에 맡겼다. 그 물량만 차로 세 번 옮겨야 했다.

광고에 쓰고 남는 돈은, 49재까지의 비용으로 쓰시라고 봉하마을로 전달하기로 했다고 하고. 쪼잔한 가카네가 장례식까지의 비용만 지원하고 49재와 묘비 등에 들어가는 돈은 쌩깠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걸 추진했던 거다.

액수도 액수지만... 이런 행사 한 번 하려면, 카페지기들은 상당한 수준의 정치적인 행동들을 해야 한다.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고(이번 바자회에서 실제 뛰어다닌 쌍코 회원들만 50명, 온라인에서 활동한 사람들은 500명이란다), 사소한 차이로 갈등이 생기기 쉬운 다른 카페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의견조율을 해야 하니까.

고인의 정치적 포지션보다 왼쪽으로 몇 클릭 가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행사목적'자체가 맘에 안들게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행사목적'이 아니라 이런 것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정치적으로 관심없었던 사람들이 엄청난 학습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책으로 배우는 정치가 아니라 몸으로 직접 경험하는 정치. 이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인가?

작년 촛불 이후, 그 에너지는 어디로 갔는가를 묻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정작 그 동력들은 고스란히 작동하고 있다. 남자들이 '희망은 어디에 있나요?' 혹은 '요즘 20대들 말이야~!'를 말하는 동안, 작년 촛불의 핵심동력이었던 2~30대 여성들은 말을 앞세우지 않고,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날, 신림동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음에도 조계사는 선선한 바람만 불었었다. 비가 와서 제대로 진행도 안 될거라고 생각했다가, 이런 대성황을 이루고 있는 거.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으면 가카 시대가 아니겠지? 쌍코와 대장부엉이가 옷을 팔고 있었던 곳은 분수다. 이 분수 틀어야 한다고 종로구청 시설과 아저씨가 찾아왔었다.



더불어 종로서 정보과 형사들이 총출동했더라.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국가공무원들에게, 본 우원 딱 한 말씀만 드리겠다.
일제시대때 열심히 일하면, 그게 친일파라고.

사람이 희망이다. 하지만 그게 희망이 될 수 있으려면... 스스로 행동해야 한다.

이 행동에 나서고 있는 대한민국 여성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전임논설우원 Samuel Seong


 


다행히 그 어떤 사진에서도 내 사진은 발견되지 않았다 (발견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그 정신없던 계산대 근처에서 사진을 찍은 몇몇 사람이 있긴 했지만
판매쪽에서의 사진들에 비하면 거의 없었던 정도였다

바자회 그 후 일주일이 지나도, 매일 계좌정산을 했다
내일 광고가 실림에도 불구하고 어제까지 모금계좌에 돈이 들어왔다


작년부터 쭈욱 역사의 이 현장에 내가 숨쉬고 있음이 참 감사하다
너무너무 힘든 일들 뿐이지만,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아서 짜증만 나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는 그 믿음 하나로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고 많이 낙심했지만, 난 많은 것을 할 수 있다
앞으로 3년만 잘 버텨서 대통령 선거에서 반드시 승리하면 되는 것이고,
그 전의 지방선거에도 절대 내 소중한 한표를 사장시키지 않겠다


경향신문 젤 뒷면 전면광고를 위해서 1500만원 모금 바자회를 열었다
1500만원이라는 큰 금액을 과연 모을 수 있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바자회 수익금으로 2000만원을 모았고, 모금계좌에 400만원정도가 모였다

당연히 경향신문 젤 뒷면 전면광고를 할 수 있는 금액이다


그런데 다들 욕심을 냈다
한겨레신문에도 전면광고를 내고 싶다고 욕심을 냈다
젤 뒷면은 1500이고, 중간의 전면광고는 1000이라고 했다


아쉽지만, 경향은 젤 뒷면 광고를 하고, 한겨레신문에는 중간 전면광고를 하려했다


그런데 경향과 한겨레에서 추모광고이니 우리 모금액으로 젤 뒷면 전면광고를 해주신다 하였다


3천만원으로 할 수 있는 광고를 2400만원에 하게 되어 참 기쁘다
하지만 두 신문사에 누를 끼친것 같아서 참 죄송스럽다

10원짜리까지 탈탈털어서 다 보내드리고 나니 마음이 후련하다


내일 신문이 기대된다



하지만 난 내일 그 어느곳도 가지 못할 것 같다
여전히 분향소가 낯설고 49재도 낯설다
묘역이라니... 낯설다 낯설어....
Posted by Ria.


 

2002년 대선 때, 나는 외국에 나가 있었다. 국내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낙선운동 때처럼 차에 구호를 붙이고 다니든 노사모를 하든 그 비슷한 일을 했을 것이다. 내 한 표를 도울 수 없었지만 노무현 씨가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소식에 나는 정말 뛸 듯이 기뻐했다. 이제 우리나라가, 배경이 아니어도 학벌이 아니어도 자신의 능력만 된다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나라가 되었구나. 아니, 우리 국민 개개인이 이제 이러한 선택을 할 수 있는 그런 국민이 되었구나. 세상에 눈을 뜰 때부터 마음깊이 바라던 것, 그를 위해 애쓰던 것, 이제 우리나라에 차츰 이루어지는 거구나. 나는 정말 기뻐했다.

나는 유신말기에 대학에 들어가 군 복무 중에 80년을 만났다. 시대상황이 겹쳐 끝끝내 ‘나의 옷’이 될 수 없었던 군복... 그러나 머릿속 생각과는 달리, 복학 후에 나는 앞서가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저 뭉게뭉게 학교를 질기게 다녔다. 데모가 있으면 맨 뒤에 따라가다가 제일 먼저 도망오는 자였고, 소란스런 사회에서 한발 비껴 살면서 더 용기있던 사람들의 악전고투를 멀거니 지켜보고 있던 자였다.

어느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사실 나는 데모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국민이 자신들의 의사를 시위로서 표현할 수 있으나 시위는 시위에 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힘없는 자라 하여 멸시되지 않는 세상과 사람이 가진 돈으로 평가되지 않는 세상이기를 바라는 마음, 반칙과 특권보다 성실과 정도가 존중되는 사회를 바라는 마음 등등, 앞서가던 사람들과 기타 많은 사람들이 가슴속에 바라던 것들을 나도 똑같이 바라고 있기는 했다. 진보, 보수를 굳이 나눈다면 진보 쪽에 좀 기울어져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그저 남들하고 비슷한, 막연한 바램을 가진 평범하고 가끔은 비겁한 사고의 소유자일 뿐이다.

***  

그런 나에게 노무현은 신선했다. 감히 명패를 집어던질 수 있는 사람, 3당합당을 거절할 줄 아는 사람, 부산에 출마하여 낙선할 줄 아는 사람, 자신의 손실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 사람, 눈앞의 이익보다 지켜내야 할 더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아는 사람. 정치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그 모습 때문에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이 후보 노무현에 환호했으리라.  

그러나 노무현 정부는 기대만큼 이루어가지 못하였다. 싸움이란 항상 양측 모두에게 다소간의 책임이 있는 것이지만 내게 가장 안타까운 건 조중동을 읽는 사람들도 우리 국민임을 노무현 정부가 간과한 듯이 보인 부분이다. 나는 노무현 정부의 제반 표어에 찬성한다. 지역균형발전이라든가, 좀 더 어려운 사람에의 배려, 북한과의 상부상조의 추구, 기타 등등 노무현 정부에서 내걸었던 제반 기치에 나는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하지만 우리 정치사회가 ‘대통령 노무현’을 인정하기 싫어했기 때문이랄까 노무현 정부 스스로의 미숙성에서 오는 때문이랄까 어쨌든 여러 가지에서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 끄집어낸 화두를 감당해내지 못하는 모습들을 보였다. 민주정치란 설득이 우선이어야 하며, 설득되지 않은 정책의 강행은 부작용만 강조되는 것임에도, 노무현 정부의 의욕이 현실을 무시하며 내쳐가는 모습처럼 보이는 일들은 내게 많이 안타까웠다.

정권 후반에는 나 역시 노무현 정부를 심각하게 비난하고 있었음을 고백한다. 결국 노무현 정부는 실패한 정치실험이란 평을 받으며, 그를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의 꿈을 함께 접어내리는 모습으로 청와대를 내려왔다. 지지부진한 야권은 그저 샅바싸움에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상실해 가고 있고, 희망을 바랐으나 실망을 맛볼 수 밖에 없던 많은 국민들은 이제 인간 노무현의 절벽에서의 절망을 바라보며 우리가 환호했던 희망이 다시 어둠속으로 침잠해 가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아 가슴깊이 서글프다.

**

인간 노무현의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하자. 그러나 우리가 언제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며 더 중요한 것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던가? 미숙했을지 몰라도 그러한 순수한 열정을 지닌 정치가를 본 적이 있던가? 그럴듯한 ‘말’들은 눈만 뜨면 발끝마다 걸리고 채여도, 어디 그렇게 선택하는 ‘행동’을 우리가 본 적이 있던가?

한때 그를 비난하는 대열의 일부였기도 한 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절망에 애도를 표할 자격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의 서거에 깊은 슬픔을 같이 한다. 실수가 있었겠지만 자신의 실수보다 몇 십 곱절의 비난을 받은 사람, 실수를 빌미로 자신의 지켜온 꿈을 사회가 짓뭉개는 것을 감수해야 했던 사람의 절망이 마음 깊이 아프다. 방법론의 차이였겠지만 나의 비난도 그에게 절망을 한방울 더 보탰으리라...

***

그러나 우리는 그의 서거를 애도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아니 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생각할 수 있다는 것, 돌이켜 깨달을 수 있다는 것, 땀 흘려가며 애쓸 줄 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우리 아이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듯이 우리는 그가 바랬던 것들을 되살리고 깨우쳐 실패하지 않을 미래를 다시 찾아내야 한다.

가진 게 모자라 포기하며 살아야 했던 젊은 시절과 달리, 지천명의 나이를 넘어서면서 나는 주제에 비해 가진 게 너무 많은 사람이 되어 있음을 느낀다. 사람이 가진 게 많으면 두려운 게 많은 법이고, 변화를 싫어하게 되는 법이다. 나이 들면 사람은 보수화된다 했나?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젊은 시절에 마음껏 뛰쳐 내보내지 못한 바램들이, 인간 노무현이 바라던 것들과 같은 것들이, 사람들의 마음 깊은 속에 있는 것들이, 지금도 그냥 그대로 파르라니 살아있음을 느낀다.

사람마다 생각이란 조금씩 다른 법이고,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를 보는 개개인의 느낌이 모두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노무현 전대통령이 바라던 많은 것들이 아직도 우리 국민들의 가슴속에 깊은 바램으로 살아 있음은 분명하다. 없는 자라고 구박받지 않는 세상, 순수함이 존중받는 세상, 땀방울이 인정받는 세상을 바라는 모든 이들에게... 맨 뒤에 따라가다가 제일먼저 도망오던 자이지만 나는 소리쳐 부탁하고 싶다.

그대들아, 포기하지 말고 그대들 가슴속의 불씨를 지키라. 그대들 가슴속의 불씨를 키워가며 언젠가 그대들 중 하나가 다시 횃불을 치켜들 때... 우리는 뼈아픈 깨달음으로 진화된 새로운 불길을 이 세상에 다시 지펴낼 수 있어야 한다. 쓸데없는 화풀이와 허망한 정쟁에 그의 절망을 낭비하지 말고... 혹 우리의 생애에 만나지 못할 지라도, 우리 아이들의 세상을 위하여... 지치지 않는 사랑으로 그대들 가슴속의 불씨를 키우라. 그것이 살아남은 자의 사명이며 더 나은 세상을 바라 목숨을 던진 이들을 위한 진정한 애도이다.


충북대학교 약학대학
교수 박일영 
T. 043-261-2812 
(P.S. 이 글은 어디든 그대로 옮겨가셔도 좋습니다. 옮겨주시는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멋진 교수님이시다
교수님의 용기가 부럽고, 고백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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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ia.
2009. 6. 1. 19:33

처음 분향하러 갔던 송내역
아무런 생각도 안들고 그저 왜 저 분의 영정이 있지.. 하는 의아한 생각뿐이었다
한번도 헌화해본적이 없어서... 헌화를 하고 절해야하는줄도 모르고,
헌화할 타이밍을 놓쳐서 절 할때 내 손에 있는 어정쩡한 국화 한송이

송내역 분향소를 뒤로하고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는
간단한 예의도 못차려드린 것 같아서 내내 죄송한 마음뿐


조문을 하면, 돌아가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영정사진앞에서 울어버리는 것도, 돌아가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 같아서...
조문하면서도 울지 않았고, 영정사진 앞에서도 울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영결식이 지나면 조문을 할 수가 없다기에
마음을 추스리고, 정리하는 마음으로 대한문에 길게 늘어선 줄에 서려는데
엄청난 사람들의 무질서함에 눈을 찌뿌리다, 이미 자원봉사에 지원하고 있는 내 손
이 줄이 과연 오늘 밤 사이에 다 줄어들기는 할까 하는 걱정


송내역 분향소에서 모자란 조문이 못내 찜찜하여
대한문에서는 꼭 격식 차린채 보내드리고 싶어서 먼 길 한걸음에 불편한 차림으로 달려왔거늘
새벽 네시반, 30분가량 기다려서 뵙게된 영정사진 앞에서
또 다시 먹먹함에 울음을 꾹 참고 그저 절 두번 하고 말았다



밤새 한숨도 못잔터라 피곤함이 쏟아지지만
전광판에서 나오는 봉하마을 발인식을 보며 또 다시 울음을 참아본다



뙤약볕 아래 영결식이 끝나고 노제를 지켜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배고프다는 얘기로 밥집에 앉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냥 한가로이 늦은 점심을 먹고
다른 일로 피곤한 것은 없고 단지 밤을 샜기에 피곤하다는 억지생각을 하며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정확히 일년 전에 나만 다른 세상에서 지하철로 투입된 것처럼 느꼈던 그 기분이
일년 후에도 똑같이 느끼게 될 줄이야...




그리고나서 첫 인터넷
세상은 이러쿵저러쿵 말이 참 많고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하지만, 죽은 공명이 산 사마중달을 내쫓았듯
말 없는 자의 그 위대함이 살아있는 사람을 위협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Posted by Ria.


 

 

 이런 교수님 밑에서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그냥 너무 기뻤어요

 교수님이 나랑 같은 생각을 하신다는게...


출처 연이말 http://cafe.daum.net/nowwetalk/Kfz/159049



아침에 출근을 해서 이런저런 기사를 보고, 이런저런 까페글을 보고,
아무 일도 못하고 넋놓은채 울고 있다
저런 교수님 밑에서 배울 수 있는 학생들이 참 부럽다

서울여대 철학의 이해 과목을 담당하시는 교수님이라고 하며
성함을 찾아보려했으나, 서울여대 재학생이 아니라 찾을 수가 없었다


씁슬한 날들이다
Posted by Ria.

[謹弔] 인간 노무현을 보내며


2009.5.23. 토요일


여느 때처럼 일어나 습관적으로 인터넷을 켰다. 배우 여운계씨의 죽음. 어젯밤에도 본 것이었지만 여전히 안타까운 소식이다. 씁쓸한 마음을 머금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다시 뉴스 화면으로 돌아왔다.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기도설’

하하… 이건 또 무슨 수작이냐. 87년도인가 김일성이 죽었다는 오보 사건 때보다 더 황당하다. 바보 언론들 또 한 건 하는구나.

하지만 다시 짧은 기사들이 연이어 올라온다. 그리고 조금씩 구체화되는 내용들. ‘노무현 중태’, ‘노무현 위독’, 급기야는 ‘노무현 사망’. 아. 이건 오보가 아니다. 정말 죽었구나. 정말 스스로 목숨을 끊었구나. 노무현이. 다른 사람도 아닌 그 노무현이.

이렇게.





…나는 소위 노빠는 아니다. 물론 고인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누구보다 기뻤고 그 사건이 역사적인 쾌거였다고 지금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같은 이유로 탄핵 책동 때도, 본지 지면을 통해 평소답지 않은 강한 어조로 비난을 퍼부은 바 있었다.

다만 그가 우리나라를 송두리째 바꿔 놓는 대업적을 이룩할 거라는 기대를 가진 적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어디가 어때서가 아니라, 우리나라 정치, 아니 정치라는 것의 본성 자체가 개인의 양심이나 이상을 통해 그런 식으로 금방 변해 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국민을 빽으로 대통령이 되었지만, 그리고 그게 가장 옳은 모양새긴 하지만, 그 국민의 마음이라는 것도 실은 갈대와 같다. 결국 그 틈을 주류의 기득권 세력이 조금씩 뚫고 들어와 휘저어 버리고 만다. 실제로 그런 일이 우리나라에서 일어났고, 국민의 영웅 노무현은 어느틈엔가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낙인 찍혀 버렸었다.

하지만, 그래서 노무현 시대가 실제로 퇴보와 좌절의 시대이며 나아가 ‘잃어버린 10년’의 반쪽이었던가? 물론 아니다. 여기에 대한 나의 견해는 작년 이명박 정부 출범 때 쓴 글에 잘 나와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은 읽어봐도 좋겠다.

[칼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적이 아니라 상식이다

[칼럼] 자영업 몰락의 진실

[칼럼] 대규모 실업사태의 진실

위 글 중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잃어버린 10년은커녕, 노무현 취임 전에 해외에 나가서 집권 말미에 돌아온 나의 눈에 우리나라의 그간의 발전상은 그 어느 시대 못지 않게 피부로 느껴졌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지고 눈빛에 자신감이 차 있었다. 그런 적 없다고?

글쎄. 스스로는 못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소위 선진국이라는 나라에서 살다 온 나의 눈에는 그 몇 년 사이에 사람들 얼굴에서 나타난 변화가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의심의 여지 없이, 우리는 분명히 발전하고 있었다. 비록 개발 독재 시대와는 좀 다른 의미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가 우리에게 준 것이다. 놀림을 당해 가면서까지 스스로 파기한 최고 권력의 권위, 그 결과 역사상 최초로 권위의 시대에서 해방된 우리 사회가 갖게 된 민주주의와 주체성의 소박한 밝음이었다. 대통령 노무현은 도도한 시대 흐름의 중심에서 바로 그것을 만들어 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 흐름을 받아 계승할 만한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의 실체를 제대로 느끼지 못했고, 오해했고, 심지어 한껏 비웃었다. 우리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박정희를, 심지어 전두환을 그리워했고, 그 결과 오만 가지 얼룩에도 눈을 감아 버린 채 그저 돈 벌게 해 준다는 이명박에게 덜컥 나라를 맡겨 버렸다.



물론 노무현은 (우리 모두나 마찬가지로) 완벽하지 못했다. 실수도 했고 한계도 있었다. 측근의 비리도 존재했다. 부인과 자녀들의 잘못된 행보도 있었고 이 부분들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노무현을 잡아 넣기 위한 끈질긴 보복성 표적 수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와 관련된 회사들을 사정 요원 수십 명이 수개월간 이 잡듯이 뒤졌다. 그 결과 수십억 규모의 문제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여담이지만 이명박 퇴임 후 이렇게 털어 본다면 과연 뭐가 얼마나 나올지, 무척 궁금하다).

물론 돈 문제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버젓이 살아 숨쉬며, 심지어 노구를 이끌고 여기저기 골프나 유람도 다니던 전두환과 노태우는, 90년대 초반 의 돈 가치로 수천억 원을 해 먹고도 (지금으로 보면 조 단위 규모일 것이다) 아직 추징금도 다 내지 않고 있다. 몇 년 전 전두환은 남은 재산이 몇 십만 원 밖에 없다고 신고해서 국민의 쓴웃음을 자아낸 적도 있다.

세상이 이런데, 노무현은 결코 죽을 이유가 없었다. 조금만 더 뻔뻔했더라면, 조금만 더 스스로에 대해 관대했다면, 조금만 더 눈 딱 감고 버텼다면, 널찍한 감방에서 기껏해야 한 2년 살다 나오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 다음 다들 그러듯 적당히 억울해 하면서 국가 원로로 훈수나 두며 살면 되는 거다. 하지만 바보 같은 그는 그러지 못했다.

완고한 이상주의자. 타협을 모르던 투사. 그의 양심과 자존심이 그런 삶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권부의 속성에 조금씩 물들어버린 나약한 주변을 마냥 탓할 수도, 또 결과적으로 이를 허락하고 만 자신을 용서할 수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스스로 추구했던 깨끗함을 지켜내지 못한 데 대한 절망감과 퇴임 이후 거꾸로 가는 세상에 대한 회한, 그리고 오랜 투쟁의 삶 속에서 수십 년 간 쌓인 피로와 외로움이 얼마나 컸던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런 고집불통의 노무현이지만, 40대의 젊은 나이에 아직도 서슬이 퍼런 전직 대통령을 향해 호통치던 성깔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들에게만큼은 한번도 성질을 부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기는커녕 너무 권위가 없어 세간의 비웃음만 당했던 대통령. 그게 인간 노무현이 추구하던 민주주의였다. 너무 앞서 갔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옳은 방향이었다.

그러나 노무현 이후 불과 1년여, 한때 국민을 섬기겠다며 촛불에 고개 숙였던 이명박은 이제 그 촛불을 하나하나씩 다 잡아 들이고 있다. 방송, 부동산, 교육, 용산… 사회 전 분야에 걸쳐서 있는 넘들끼리 잘 먹고 잘 살자는 수작이 너무 뻔한데도 눈 가리고 아웅이니 그 뻔뻔함이 하늘을 찌른다. 도심집회 원천 불허니 민주노총 집회 불허니 하는 것을 보면 이들에겐 헌법도 그저 거추장스러운 허울일 뿐이다.

무원칙, 무인권, 무헌법의 3무를 적극 실천하는 이 독재/무식/무대뽀 정권이,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려 그토록 애썼던 노무현의 뒤를 이어 지금 대한민국을 통치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만들어낸 엄혹한 현실이다.

그리고 이제, 노무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는 결코 죽을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자신에 대한 처벌이 자살이라면 이것은 너무 가혹하다.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도 너무 가혹하다.

오점은 오점대로 인정하고, 오래 살면서 자신의 시대에 대한 역사의 평가를 지켜봐야 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시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묵묵히 버텨 줘야 했다. 이렇게 버리고 가는 것은 너무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는 이 극단적인 수단을 통해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해도 변명으로 밖에 들리지 않을 상황에서 말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전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내가 이만큼 했으니 앞으로는 너희들이 해라. 하지만 너희들은 이런 나보다 더 잘 해야 된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그가 그런 식으로 우리와 소통할 수 밖에 없었던 거라면 그것이야말로 비통한 일이다. 그렇다. 비통하다. 일국의 대통령, 그것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거대한 변화를 시도했던 그를 그렇게 내몰고 이렇게 보내야 했다는 것이 너무나 참담하다. 최소한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이 고통과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마음이 진정될 쯤에는 다시 한번 힘을 내야 한다. 그냥 무너져 버릴 수는 없다. 이제 그의 뒤치닥거리는 우리 몫이기 때문이다. 할 일이 많다. 생업에 바쁜 가운데서도 옳고 그름, 착하고 악함은 구별하며 살아야 한다. 돈보다 소중한 것이 세상에 있고(말 뿐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것을 위해 사는 모습도 때로는 보여야 한다. 남의 부족함을 비웃지 말고 연민하고, 남의 아픔을 같이 느낄 줄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어떻게 하면 그것을 이 어두워진 땅에 제대로 구현해 낼 수 있을지 끝없이 고민해야 한다.

나는 그것이 그가, 새벽녘의 그 절벽에서 외롭게 뛰어내리며 우리가 알아줬으면 바랬던 마지막 소망이라고 믿는다.



이제 글을 맺으며, 고인께 드릴 것이 있다. 이 모든 정신 없는 하루 동안의 비극 속에 엉뚱하게도 내가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고인이 투신 직전 동행했던 경호원에게서 담배 한 대를 찾았다는 이야기였다.

그 담배 한 대. 사형수에게도 허락되는 생애 마지막 담배 한 대조차도 주어지지 않은 죽음. 대한민국의 16대 대통령이자 우리 민주주의의 희망이었던 인간 노무현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다.

그래서, 비록 직접 드릴 수는 없지만 이렇게 글로써라도 권해 드리련다.

한대 붙이세요. 그리고 이제 푹 쉬세요. 빌어먹을 놈의 세상에서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마냥 헛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럼요.






정신이 혼미해서 어떻게 글을 써내려가야할 지 모르겠다
이 글이 내 마음과 가장 비슷하여 글을 퍼왔다

참 슬프고 잠들기 힘든 날이다

Posted by Ria.
 







그새 또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는 잊지 않도록 노력하려 한다

그 동안 잊고 있어서 너무 미안해요...
나 살기 바쁘다고 잊고 있어서 미안해요...


Posted by Ria.

전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전직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는
반나절을 어떻게 지냈는지도 모른채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오후 네시부터 서울 시청 근처 대한문에서 분향이 이루어진다고 하여
비록 지금 갈 수는 없지만 마음이나마 함께하고자 중계방송을 열었습니다
가득 깔린 전경떼를 보니 마치 작년 이맘때가 떠올라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옵니다


별 일 없겠지 하고 한동안 통화를 하고나서 본 현재 상황은
정말 니들이 사람이긴 하니? 라는 생각이 듭니다
분향소의 천막은 빼앗아갔고, 영정마저 빼앗길뻔했던 것을 시민들이 지켜냈습니다 (다시 또 빼앗겼습니다)
추모하러 오는 시민들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고, 추모하고 헌화하고 나오는 것만 가능해보입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소식으로는, 추모에는 관심없고 채증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불법집회의 범주 속에는 전직 대통령의 추모를 위해 헌화를 하는 것도 포함되어있나봅니다


작년의 촛불집회에 더 나가지 않았던 이유는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나와서 하루종일 시간때우고,
뭣도 모르는 학생들이 놀거리 없으니 밤새 맘 편히 논다는 비아냥을 듣는 것이 참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회를 떠나있었고, 그런 비아냥에 맞설 수 있게 누구에게도 당당히 소개할 수 있는 내가 되고자했습니다


이제 조금은 당당해질 수 있는 내가 되어가고 있는데,
이렇게 너무 존경하는 분이 돌아가셔서 마음이 아픕니다


먼 발걸음이 되겠지만.. 분향소에 다녀와야겠습니다



 

뉴스속보 판넬이 보입니다. 하지만 시청앞 전시는 견찰에의해 곧 철거됐습니다.

 

 

견찰이 시청앞 주변에 차벽을 만들고 지하철 입구를 봉쇄하고 있습니다. 

 

 

3시50분 대한문 앞에 추가 병력이 진입하고 있습니다. 

 

 

시청앞에 전투견찰이 대거 진입하고 있습니다. 원천 봉쇄중입니다.

 

 

시청 주변의 시민들은 견찰병력에 의해 대한문 방향으로 쫒겨났습니다.

 

 

4시,  대한문에 노무현대통령 추모를 위해 시민들이 모이고 있습니다. 

 

 

故노무현대통령의 헌화 및 분향을 위해 학생들이 준비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4시 30분, 분향 장소에 견찰이 덥치고 있습니다. 국화 한송이 바칠 수 없습니다.

 

  

 

4시50분, 시민들이 만든 임시분향소가 강제 철거되고 있습니다.


故노무현대통령 영정 사진도 빼앗기고 있습니다.






분향소를 부수고 있는 전경들

 

 

 

  

캡쳐를 하려해도 너무 전경들이 박력있고 빠르게 분향소를 없애주셔서...
도저히 캡쳐를 할 수 없기에 다른 이들의 캡쳐를 사용하였습니다
Posted by Ria.

사람세상’ 홈페이지를 닫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처음 형님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설마’했습니다. 

설마 하던 기대가 무너진 다음에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용서 바랍니다.’
이렇게 사과드리려고 했습니다만, 적당한 계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마음속 한편으로는 '형님이 하는 일을 일일이 감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변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500만불, 100만불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제가 알고 모르고를 떠나서 이미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명예도 도덕적 신뢰도 바닥이 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말을 했습니다. 

‘아내가 한 일이다, 나는 몰랐다’ 
이 말은 저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전들 어찌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국민들의 실망을 조금이라도 줄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정치를 떠난 몸이지만, 제 때문에 피해를 입게 될 사람들, 
지금까지 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고 계신 분들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습니다. 

또 하나 제가 생각한 것은 피의자로서의 권리였습니다.
도덕적 파산은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피의자의 권리는 별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실’이라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앞질러 가는 검찰과 언론의 추측과 단정에 반박도 했습니다. 
그런데 정상문 비서관이 ‘공금 횡령’으로 구속이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 마당에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비웃음을 살 것입니다. 

제가 무슨 말을 더 할 면목도 없습니다. 
그는 저의 오랜 친구입니다. 
저는 그 인연보다 그의 자세와 역량을 더 신뢰했습니다.
그 친구가 저를 위해 한 일입니다. 제가 무슨 변명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를 더욱 초라하게 하고 사람들을 더욱 노엽게만 할 것입니다. 

이제 제가 할 일은 국민에게 고개 숙여 사죄하는 일입니다. 
사실관계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나면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는 이제 이 마당에 이상 더 사건에 관한 글을 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회원 여러분에게도 동의를 구합니다. 
이 마당에서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합시다. 
제가 이미 인정한 사실 만으로도 저는 도덕적 명분을 잃었습니다.
우리가 이곳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사람들은 공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정치적 입장이나 도덕적 명예가 아니라 피의자의 권리를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이것도 공감을 얻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제가 말할 수 있는 공간은 오로지 사법절차 하나만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곳에서 저를 정치적 상징이나 구심점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사건 아니라도 제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방향전환을 모색했으나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해 고심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런 동안에 이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이상 더 이대로 갈 수는 없는 사정이 되었습니다. 

이상 더 노무현은 여러분이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미 민주주의, 진보, 정의, 이런 말을 할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이미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수렁에 함께 빠져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 

적어도 한 발 물러서서 새로운 관점으로 저를 평가해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저는 오늘 아침 이 홈페이지 관리자에게 이 사이트를 정리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관리자는 이 사이트는 개인 홈페이지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회원 여러분과 협의를 하자는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 글을 올립니다. 
이제 ‘사람 세상’은 문을 닫는 것이 좋겠습니
Posted by 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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